[WATCHA] 미세스 아메리카
[WATCHA] 미세스 아메리카
  • 김신강
  • 승인 2020.11.14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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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뭐 볼까?] 왓챠 - 미세스 아메리카

1970년대 미국 성평등 헌법수정안을 둘러싼 10년간의 투쟁기




[2020년 11월 14일] - 2020년 미국 대선이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이 승복은커녕 박빙으로 패배한 곳 중심으로 소송을 걸며 아직 최종 확정이 되지는 않았고 펜실베니아 주에서 트럼프 측의 소송을 일부 받아들이는 등 논란이 남아있지만, 대세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이번 대선은 미국 역사상 진영, 성별, 인종 간의 갈등이 가장 극심하고 격렬한 선거로 기억될 공산이 크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 아래 출범한 트럼프 정부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아시아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노골화했고,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이 촉발한 대규모 시위는 트럼프의 낙마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트럼프는 임기 동안 파리기후협정, 세계보건기구를 연달아 탈퇴하며 유럽은 물론 수많은 우방과의 단절을 자처했다. 중국과는 수 차례 무역전쟁을 벌이며 소모적인 힘겨루기에 골몰했다.

지난 4월 훌루에 공개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왓챠에서 단독으로 서비스되고 있는 ‘미세스 아메리카’. 1970년대 미국 성평등 헌법수정안, 이른바 ERA(Equal Rights Amendment) 비준을 둘러싼 10년간의 투쟁을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드라마는 50년 전 이야기임에도 2020년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정치적 진화가 얼마나 오래 걸리고 힘든 일인지를 시사하는 작품이다. 미국과 한국 모두 정치적 갈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는 요즘 한 번쯤 보면 좋을 듯하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은 정치적 이슈를 둘러싼 여성 정치인들 간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미국 보수 진영의 퍼스트레이디라 불렸던 안티 페미니스트 활동가 필리스 슐래플리와 잡지 ‘미즈’의 창간인이자 당대의 페미니스트 아이콘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양 진영의 축을 이루고 있다. 물론 둘 다 실존 인물이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보수 정치인 슐래플리 역할을 맡은 배우가 다름 아닌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공개석상에서 여러 번 여성을 대변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페미니스트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미국 아카데미상, 세 번의 골든 글로브상, 세 번의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수상에 빛나는 대배우인 블란쳇은 국내에도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데, ‘반지의 제왕’, ‘아임 낫 데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블루 재스민’ 등에서 선 굵은 연기를 보여줬다. 그녀는 메릴 스트립 이후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원톱 여배우이며, ‘한계가 없는 배우’라는 극찬을 받는 사람이다. 여러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억양은 물론 시대에 따른 말투까지 연습하는 성실성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케이트 블란쳇을 전 세계 팬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각인시킨 작품은 누가 뭐래도 블란쳇에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캐롤’이다.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백화점 여성 점원과의 사랑 연기를 펼쳤던 블란쳇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상 후천적 레즈비언으로 느끼는 갈등과 혼란을 실감 나게 표현하며 평단과 관객의 극찬을 받았다.

블란쳇은 한 번도 본인이 공개석상에서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적은 없지만, 성 평등에 대한 주장을 숨기지 않았고, 여성과 아이를 위한 자선행사에 발 벗고 나서는 편이다. 그녀의 대표작인 ‘블루 재스민’과 ‘캐롤’만 봐도,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한 여성의 생애를 깊게 파고들어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들이다.

그런 그녀가 미국 여성 인권을 50년은 늦췄다고 일각에서 공격받는 필리스 슐래플리 역할을 맡았다고 했을 때 수많은 사람이 놀란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케이트 블란쳇은 이 작품을 통해 여성 인권을 이야기하기 위해 반드시 페미니즘을 옹호하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풀어갈 필요는 없다는 것을 영리하게 보여준다.

블란쳇이 분한 슐래플리는 ‘우리의 특권을 빼앗지 말라’라는 뜻의 ‘STOP ERA’라는 단체를 만든 인물인데, 그녀가 말하는 특권이란 여성이 남편의 ‘보호’ 아래 가정주부로서 ‘편안하게’ 살 권리를 뜻한다. 여성해방운동은 남성과 평화롭게 공생하는 삶의 균형을 깨뜨리고, 여자를 군대에 가게 만들며, 오히려 여자들에게 해가 되는 사회의 악이라는 것이다.

국방이나 안보에서 남성들을 압도하는 전문가적 식견을 보여주지만, 매번 토론회나 모임에 가면 외모 칭찬이나 야한 농담만 들리는 한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오히려 안티 페미니즘 진영에 서서 영향력을 키워가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사실 슐래플리는 현실에서도 유명한 선동가였는데, 케이트 블란쳇의 압도적인 연기력에 힘입어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트로이’, ‘엑스맨 시리즈’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로즈 번이 맡은 스타이넘은 진보 진영의 아이콘이다. 아름다운 외모 탓에 페미니스트들조차 그녀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는 전략을 마다하지 않는데, 정작 이것 때문에 같은 진영의 사람들에게도 공격받는 빌미가 된다. 그녀 역시 슐래플리 못지않은 화려한 언변과 선동 능력을 과시한다.

드라마는 실존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 만큼 9개의 에피소드에 각각 중심인물을 하나씩 배치하고 그 인물들을 중심으로 당대의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의 연출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드라마는 상당히 중립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고, 이 방식은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관객에게 역사를 전달해 주는 반면 드라마적인 재미는 상당히 떨어뜨린다.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나오지만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미국의 지난 역사라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데다가 어떤 극적인 사건보다는 시대를 조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가 오늘에 의미가 있는 것은 이 여성해방운동이 결국 실패로 귀결되는 과정이 남성이 아닌 여성과 여성의 갈등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는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요즘 소위 ‘사또 3천만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정도로 혐오 발언, 비판을 위한 비판이 넘쳐난다. 정치적으로는 상대 진영뿐만 아니라 내부 갈등도 엄청나게 심하다. 부동산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민주당 지지자도 많고, 추미애 장관을 비난하는 여당 의원도 있으며, 제1야당의 경우는 당 대표와 예비 대선주자들의 힘겨루기가 국민들을 피로하게 한다. 정의당은 박원순 시장 사망 당시 대표와 의원들이 다른 결의 발언을 연달아서 하면서 대규모 당원 탈퇴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연히 이런 갈등은 더 나은 해결방안을 찾는 과정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갈등 과정에서 인신공격과 혐오 및 차별 발언이 난무하며 사회 전반적인 스트레스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전 국민이 힘들어하는 시국에 악의적 비난이 난무하는 뉴스가 매일 도배되면 사회 구성원의 전체적인 의지가 상실된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 심각한 건인지도 모른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단순히 옛날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을 다루고 있지 않다. 물론 초점은 철저히 여성에 맞춰져 있지만, 정치 집단들의 이익 추구가 일어나는 방식, 각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개인 혹은 그룹이 전략적으로 뭉치는 메커니즘 등을 간접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1970년대의 이 치열함을 지켜보고 있으면 2020년의 사회 갈등이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By 김신강 에디터 Shinkang.kim@weekly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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