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퀸스 갬빗
[NETFLIX] 퀸스 갬빗
  • 김신강
  • 승인 2020.11.06 0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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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뭐 볼까?] 넷플릭스 - 퀸스 갬빗

어느 천재 체스 소녀의 1960년대 이야기




[2020년 11월 06일] -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서양의 장기 체스. 보드게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체스는 전 세계 수 억 명이 즐기는 전통의 놀이이고 특히 북미와 유럽에서는 우리나라의 바둑 이상으로 높은 인기를 여전히 자랑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영화 속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게임에 불과했다. 그러던 게임이 우리나라에서 때아닌 화제로 부각됐다. 왜일까?

체스가 정말 재미있는 게임이거나 우리나라의 누군가가 서양의 쟁쟁한 선수들을 연달아 꺾었다는 뉴스가 있어서가 아니다. 바로 넷플릭스의 신작 ‘퀸스 갬빗’ 때문이다. 요즘 유튜브나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을 타고 그야말로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작품이다.

넷플릭스 자체 집계에서 퀸스 갬빗은 한국에서 5일 기준 4위에 올라있다. 1위에서 7위까지 작품 중 유일하게 한국 작품이 아니다. 미국 조사기관 FlixPatrol에 따르면 전 세계 1위다. 일부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를 제외하면 모조리 Top 1이다. 그만큼 퀸스 갬빗 열풍은 누군가의 마케팅이나 체험단에 의한 조작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현상이다.

작가 월터 테비스의 1983년 동명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퀸스 갬빗은 마이너리티 리포트,더 울버린 등을 썼고 두 차례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올랐던 스콧 프랭크가 연출 및 각본을 맡았다. 주인공 베스 하먼 역에는 모델 출신의 안야 테일러 조이가 맡았다. 연기 경력이 짧지는 않지만 국내 팬들에게는 무명에 가까운 배우다.

영화는 천재 체스 소녀의 성장 스토리를 다룬다. 혹자가 ‘멘탈 약한 김연아 같다’는 평을 한 적이 있는데 꽤 적절한 비유다. 퀸스 갬빗은 체스 용어인데, 한 수를 포기하면서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제목이다. 한국식으로 해석하면 ‘여왕의 한 수’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다루는 소재가 지극히 서양 스포츠라는 점이 특이하다. 더구나 넷플릭스의 주 시청자층인 2030 여성들이 체스 규칙을 알 것 같지도 않다. 한 여성이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으로 향하는 스토리는 사실 널리고 널렸다. 우리는 왜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체스 선수에게 폭 빠져 열광하는가? 그 이유를 아는 과정에 관객은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보육원에 맡겨진 (주인공) 베스는 조용하지만 깍듯한 예의를 갖췄고 명석한 두뇌로 어려운 수학 문제도 척척 푼다. 하지만 아이같은 느낌은 없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어딘가 어둡다. 보육원의 문제아 졸린이 유일한 친구일 뿐 사교성도 없다.

어느 날 베스는 칠판 지우개를 털기 위해 보육원 지하실로 내려갔다가 혼자 체스를 두고 있는 관리인 샤이블을 발견하고 어깨 너머로 몇 번 보다가 흥미를 느낀다. 체스를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베스에게 관리인은 체스는 여자가 하는 게임이 아니라고 면박을 주지만 기본적인 규칙을 줄줄 꿰는 베스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함께 체스를 두기 시작한다.

입양되어 보육원을 떠난 후 처음 참가한 체스 대회에서 우승하며 베스는 일약 스타가 된다. 어린 나이, 여성이라는 특수성은 화제성을 더하고 더 큰 대회에서 연달아 좋은 성적을 거두며 많은 상금도 번다.

스토리를 끌어가는 주요 코드는 체스 이외에도 약물, 음주가 있다. 보육원에서 주는 안정제에 중독된 베스는 약의 힘을 빌어 침착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면서는 술에 빠진다. 약물, 알코올 중독으로 체스는커녕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마저 위태로운 고비를 겪기도 하지만 조금씩 극복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베스의 이야기는 196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의외로 2020년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 위주의 체스 세계에서 실력으로 도장 깨기를 하는 모습, 의지적이지 않고 철저히 독립적인 캐릭터로 정상을 향해 묵묵히 달려가는 승부욕은 여성뿐 아니라 누가 봐도 절로 응원하게 된다.

매니저 역할을 맡지만, 딸의 명성에 기대어 제멋대로 사는 새엄마가 있지만,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하고 보듬는 것 역시 성숙한 베스다. 백마 탄 왕자를 바라거나 남성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순간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래된 소설이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의식도 저변에 깔려 있다.

장장 7부에 달하는 긴 작품을 혼자 끌고 가다시피 하는 베스 역할의 안야 테일러 조이. 1996년생의 이 예쁘장한 소녀는 엄청난 카리스마와 매력으로 드라마를 지배한다. 그녀가 아닌 베스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대범하면서도 쉽게 흔들리고 지치는 다변적인 캐릭터를 깊이 있게 소화한다. 극 중 시간 대부분이 10대로 설정되어 있지만 25살의 안야는 완벽한 베스가 되어 극 중에 녹아든다.

퀸스 갬빗은 2020년을 살아가는 많은 여성의 동질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작품 자체의 속도감과 구성도 탁월하다. 실제로 극 중 체스 선수 역할을 맡았던 베스를 비롯해 베니 역의 토마스 브로디 생스터, 해리 역의 해리 멜링 모두 촬영 전 체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체스를 전혀 알지 못해도 베스의 성장과 함께 관객도 함께 성장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허구인 줄 뻔히 알지만 이번 대회에서 꼭 베스가 우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녀의 불행하고 처절했던 삶에 대한 동정이 아니다. 노력하는 천재가 성공하는 과정 자체가 강력한 카타르시스로 다가온다. 화려한 액션도 값비싼 특수효과도 달콤한 로맨스도 없는 퀸스 갬빗이 놀랍도록 깊은 몰입감을 선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영화의 인기는 수치가 증명한다. 평점이 짜기로 유명한 IMDb에서 10점 만점에 8.9, 로튼토마토에서는 신선도 100%, 관객 점수 97%로 완벽에 가까운 스코어를 기록했다. 아카데미 4관왕 기생충이 IMDb 8.6, 로튼토마토 신선도 99%, 관객 점수 90%를 기록했으니 퀸스 갬빗에 대한 지지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시대정신, 대본, 배우의 3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작품이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천재 주인공 여성이 등장하고, 스콧 프랭크는 적절한 수위와 온도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체스 이야기를 한 사람의 성장 스토리로 잘 녹여냈다.

이 역할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녹아든 주인공과 이를 탄탄히 뒤받치는 배우들의 호연은 관객들의 7시간을 아깝지 않게 만들어준다. 초록색을 메인 컬러로 구성하는 화면의 색감과 충실한 1960년 재연은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한 작품에 이 정도 극찬을 하기는 사실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스토리 콘텐츠는 그만큼 다양한 취향을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밸런스가 이렇게 완벽히 잡힌 영웅 드라마는 처음이다. 보통 한 명이 이끌어가는 이런 형식의 스토리텔링은 억지 눈물이나 과장된 표현, 비약적인 전개가 조금씩은 들어가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가 많다.

어떻게든 관객들이 감동했으면 하는 바람에 뜬금없는 판타지가 섞이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퀸스 갬빗의 시선은 다분히 관조적이고 일면 건조하다. 그런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분명히 수동적인 관람객인데 어느새 능동적으로 몰입해 베스를 응원하게 된다. 그 기분이 싫지 않다. 감독이든 배우든 강요하는 인상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유튜버의 표현을 빌려 퀸스 갬빗에 대한 칭찬을 대신에 하고 싶다. 넷플릭스가 또 해냈다.


By 김신강 에디터 Shinkang.kim@weekly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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